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63주년을 맞게 되었다. 전후세대에게는 전쟁의 슬픔이 잊혀지고 전쟁세대는 망각 (妄覺)의 차안(此岸)에서 황혼을 맞이하는 현실에 서있다. 더구나 이름 모를 타국 오지에서 목숨 바쳐 산화한 참전 유엔군과 특히 미국인의 한(限)은 오늘날 어떻게 승화(昇華) 되어 있는가.
죽음의 빙벽(氷壁)에서 탈출한 체험의 대부분이 용맹으로 이름난 한미해병대였기에 우리들은   더욱더 이와 같은 뼈저린 역사를 알아야 한다.
흔히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렀다. 너무도 단기간인 3년 사이에 많은 수의 국군과 UN군들이 죽고 악몽(惡夢)과도 같았기에 어서 빨리 잊어버리려고 하다보니 정말 잊혀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 63주년인 오늘날 이 전쟁은 ‘절대 기억되어야 할 전쟁(The Forgotten war to be remembered)’이 되었다. 인류역사상 이런 끔찍한 전쟁이 절대 되풀이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음세대에 6.25전쟁의 교훈을 알려주자는 캠페인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잊혀진 전쟁’의 교훈을 알리는 것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본분이다.

해병대는 철수작전이 아닌 포위 돌파 진격작전이었다
화천지구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고립되어 화천에서 간신히 탈출한 한국 해병대는 중공군 39군 예하 115, 116, 117사단과 대치하여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악운이 뒤따랐다.
우리 해병대의 좌측방인 화천군 사창리 일대를 담당하던 국군 6사단 전선이 중공군에 돌파당해 우리는 하루아침에 중공군에 포위당하게  됐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미 해병1사단의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한국 해병대 1연대와 미 해병 5연대에 화천 점령 경쟁을 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좌우 측방부대와 보조를 맞춰 진격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을, 우리만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태백 준영의 산악지역은 4월이라 하지만 영하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닥뜨린 한국 해병대는 6.25 참전 이래 처음으로 악전  고투 상황에 빠졌다.
그런 곳에서 중공군 대부대의 협공을 받게 된 우리 해병대의 포위 돌파 작전은 처절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개미떼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은 마치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 같았다.
근대화된 장비를 보유하고 화력을 중시하는 미군도 야간에 도로가 아닌 곳으로 진격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하는 전법을 택했던 전례(戰例)는 아주 많다. 전사에 빛나는 미 해병대 장진호철수작전을 들 수 있다. 내가 화천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한 사례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항공기나 포병 그리고 박격포의 지원이 별로 유효하지 못한 야간에 도로가 아닌 산등성이 등을 통해 기동하리라고는 어떤 적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적의 허(虛)를 찌르기 위해서 야간에 도로가 없는 곳으로 험준한 산길로 기동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하여야 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잘 터득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다음은 화천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무려 2,700여명을 하룻밤에 사살한 뒤에 그들의 포위(包圍)를 돌파(突破)했던 내가 지휘한 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활약상이다.



<개요>
좌측방 사창리를 담당하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를 당하여 훨씬 남쪽인 가평까지 후퇴함에 따라, 미 해병 제1사단에서 해병 제1연대에게 포위망을 돌파 남하 하라는 작명이 하달되었다.
1951년 4월 미 해병사단의 작전지역에서 제 1선봉부대로 화천에서 작전 중이던 해병  제1연대 제1대대는 적으로부터 고립된 채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야간 진격작전을  감행했다.
4월 22일부터 4월 29일까지 8박9일간 벌어진 이 작전은 38도선 이북으로부터 추격중인 중공군과 맞서 대항하면서 축차(逐次)진지를 통해 전투를 벌이면서 38도선 이남인 강원도 용화산 및 명통리까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진격 이동하는 야간 철수 작전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화천읍을 미 해병대보다 먼저 진격 점령한 해병 제1대대는 화천전방에 진출한 그날 밤에 중공군의 강력한 춘계대공세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내가 지휘한 1대대는 한미 해병의 강력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무려 2,700여명의 중공군을 사살하였으나 이쯤으로 그들의 ‘인해전술’은 끝나는 게 아니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격렬한 아군의 화망(火網)도 개의치 않고 제1제대가 쓰러지면 제2제대가 그 시체를 타 넘고 전진했다. 그리하여 제3. 제4제대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한 병사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어디서 그런 용감한 전투정신이 생겨나서 개미떼같이 계속 공격 해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존경이 갈 정도였다. 그들의 용감성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이러한 광신적인 인간방패의 전술은 우리들에게 일종의 공포심마저 느끼게  하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단지 강제나 명령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지금 싸우는 이 전쟁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신념 등 이런 것들이 중공군 장병들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기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과 접전을 하면서 가끔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다.

야간 적 포위 돌파 준비
우리 해병 제1대대는 매봉산(615고지) 좌측방 월로동 능선에서 진지를 구축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 남하하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휴대용 무전기(SCR-300)로는 연대본부와 연락이 두절될 것에 대비하였으며 보병은 통달거리가 길고 등에 메는 무전기(AN/GRC-9)를, 포병연락장교는 포병 통신용 무전기(SCR- 610)를 휴대했다. 항공연락장교는 이미 연대본부에 잔류시켜 지프차에 장착된 무전기로 미 해병대 항공기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우리와 동행하는 전방항공 통제관에게 무전으로 연락하여 전투기를 대대 정면으로 유도해 근접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대 공용화기는 편제장비의 반수인 81mm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6정을 준비하였으며 사수(射手)를 평상시보다 2배로 할당하였고 탄약도 충분히 휴대하였다. 특히 대대본부 요원에게는 각각 1발씩의 81mm박격포탄을 휴대시켰다. 또한 전원이 소화기(小火器) 탄입대 하나씩을 여분으로 휴대하였다. 식량은 각자 네 끼 분을 휴대하도록 했다.  들것도 예비로 휴대시켜 이것으로 박격포와 기관총 탄약을 운반했다.  모두 각자 침낭을 휴대했는데 이는 부상자의 구호용일 뿐 아니라, 대대가 산중에 고립되어 수일간 야영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야간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표지와 유도. 엄호를 위해 배속된 포병은 황색연막탄 사격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고난의 야간 포위 돌파 작전
우리 대대는 4월 22일 북한강 북단의 화천 남쪽 전장골에서 북한강 도하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결사적으로 은밀하게 긴급히 투입된 미 해병사단 수륙양용 차량 다쿠가 도착했다. 미 해병 전투기의 근접 항공지원 및 포병 화력지원에 힘입어 나는 이곳에서 건너편 북한강 남단에 있는 월로동 고지 기슭까지 각 중대별로 차례로 도하작전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당시 1,200여명에 이르는 대대 전원이 그것도 중공군의 세력권 아래서 도하를 성공한 것은 우리 전 해병들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된다.
매봉산(615고지) 서측방에 있는 월로동 능선에서 4월 23일 02시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우선 나는 제2중대를 전초중대로 삼아 대대 전방의 구릉 같은 소나무로 울창한 지대에 진지를 구축하여 사주방어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양쪽 산허리에 1, 3중대를 배치한 뒤에 진지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사이사이에 대인 지뢰와 조명지뢰 등을 수 없이 매설하여 적의 접근에 대비하였다. 동시에 각 중대는 진지 남쪽으로 폭 2m 정도의 돌파용 통로를 흔적이 나지 않게 만들어 놓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산허리의 소나무는 매우 울창하여 우리 대대 장병들은 그 사이로 진지 바깥 쪽   일대를 볼 수 있었으나 진지 밖에서는 우리 진지를 볼 수 없게 은폐되어 있었다.
이러한 각 중대의 진지작업과 돌파통로를 만드는 등 사력을 다한 구축작업은 이른 오후부터 시작하여 밤늦은 10시경에야 겨우 끝이 났다.
나는 한 밤중이 되자 포병연락장교에게 조명탄을 집중적으로 쏘아 올려 달라고 요청하여 예하 각 중대의 사기를 드높였다.
드디어 밤 12시경에 중공군의 대부대가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그 날 밤은 만월에 가까운 달빛과 대대 지역 상공과 멀리 연대에서 수시로 쏘아 올리는 조명탄 등으로 인하여 우리 대대는 숨을 죽이고 중공군이 통과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측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길수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대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중공군 대부대는 그대로 통과했다. 
그들이 이동하면서 내는 소음과 장비의 이동 소리 등, 대지를 움직이는 듯 한 큰 소리가 우리를 압도하는 듯하였다.



포위 돌파작전의 문제점
돌파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부상자 처리였다. 보행할 수 없는 부상자는 들것에 실어 후송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전우애로, 다음에는 의무감으로 그 먼 거리를 우리해병들은 죽을힘을 다해 교대로 해냈다.
이러한 부상병의 후송은 우리 걸음을 특히 야간에는 소걸음 보다 더욱 느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공군이 그들의 돌파구를 확장하여  우리를 포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간 돌파 진격은 전진 공격과는 달리 해병들을 심리적으로 더욱 위축하게 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졸고 있는 자도 있었다.  대대 전체의 생존을 위해 모든 해병들은 거의 모두 반눈을 뜨고 졸면서 걸었다. 졸음이 심해 행군대열에서 이탈되면  낙오한다. 
낙오는 곧 죽음과 직결된다. 걸어가면서 졸다가 땅에 주저앉는 해병들을 전우들은 발로 차서 깨우고 따귀를 때려 강제로 일으켜서 걷게 했다.
아마 이런 행위는 강제노동수용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리 해병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전우애의 발로(發露)였다.

축차(逐次)진지로 진격
중공군 포위에 대응하는 돌파는 우리 각 중대들이 구축한 전초진지의 전방을 중공군의 대부대가 통과한 이후에 조심 스럽게 시작되었다.
월로동을 떠나 돌모루 능선을 지나는 동안 우리 대대는  축차적으로 맨 앞에 1중대를 시작으로 대대 지휘소를 비롯한 본부중대, 2중대, 중화기중대, 3중대 순으로 접적(接敵) 기동(機動)을 전개했다.
대대 1,200여 해병장병들은 각 중대별로 밤새 걸어, 앞서 해병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는 축차 진지를 통과하게 되면 그곳에서 다른 진지를 구축하여 뒤에서 오는 중대를  유도  하는 방식으로 계속 고지 능선을 따라 돌파 진격했다.
  간혹 돌파하는 도중에 총성이 축차진지 쪽에서 들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추격중인 중공군과 축차진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 해병들과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해병 제1연대는 이때 주력부대의 돌파를 지원하기 위해 연대 예비대인 3대대를 긴급 투입하여 1개 중대씩 축차진지에서 중공군의 전진을 와해 또는 지연시키기 위하여 지연작전을 펼치면서 우리의 철수를 지원 해 주었다.
야간에 중공군 포위를 돌파하려면 무엇보다 피아의 전투상황을 면밀히 관측하여야 성공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관측은 축차진지에서의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해병의 정신 무장
나는 이 때 매봉산 좌측 산농동에서 용화산(878고지) 용화리를 향하는 꼬박 3박 4일간을 굶다시피 하면서 야간 포위 진격 돌파 작전을 감행했다.
대대장인 내가 이러한 형편이니 부하들의 고초와 배고픔은 어떠하였으랴!
나는 지금도 돌파부대 지휘관으로서 시련을 겪으면서 그 캄캄한 밤중의 산길을 오로지 지도와 나침반을 의지하였다는 사실을 회상할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모진 ‘시련(試鍊)’을 통해서, 우리 해병들은 그 시련이 어떠함을 알게 되며 또 그에 대한 대처방법을 찾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알게 되고 해병 전우들이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부하사랑이나 전우애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겪었던 고생 못지않은, 그와 맞먹는 큰 ‘소득(所得)’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됨은 물론 또한 동료끼리는 전우애를, 상관은 부하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이 바로 해병정신임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해병정신이란 상관은 부하를 위해 희생하고 부하는 그 상관을 위해 희생하는 상호 희생정신이다. 특히 전투시에는 이 정신무장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지휘관의 희생정신은 그 부하들에게 믿음을 주게 되며, 상관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그 부하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됨으로써 상하가 일체가 되어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해병 감투정신이며 이 정신은 자기희생에서 생겨난다. 그 희생정신이란 말로만이 아니라 거기에 상응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하고 또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야간 중공군 포위 돌파
우리 대대는 떠날 때, 우선 1중대(중대장 이서근 중위)에 이은 대대지휘부와 본부중대, 2중대(중대장 이응덕 중위),  중화기중대(중대장 이홍균 중위), 3중대(중대장 강용 대위) 순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그 고지를 출발했다.
전날 밤 치열한 야간전투로 지친 해병들은 무거운 장비를 어깨에 메고 은밀히 험한 산 속으로 전진해 갔다.  방향유지 방법  으로서는 나침반과 하늘의 별, 산봉우리의 생김새, 포병의 신호탄 등을 준비했다.
그러나 깊은 계곡에 들어가면 별은 볼 수가 없고 산봉우리의 모양은 모두 비슷하여 구별할 수가 없었으며, 황색 연막탄도 별 효과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판쵸 우의를 덮어쓰고 그 속에서 전등을 켜 나침반을 보고 방향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더욱 전진을 어렵게 한 것은 4월이라고 하지만  깊은 고지 산속은 야간에는 산바람 속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매우 험준한 지형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김성은 연대장께서 예견한 대로 중공군은 우리 해병대가 설마 야간에 험한 산악으로 진격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큰 저항은 받지 않았다.

야간 전투의 한계

이때 돌파작전을 펴면서 특히 야간 행군을 할 때, 우리 상태가 어떠하였음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행군대열로부터 해병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앞의 대원의 허리띠를 뒤에서 잡고 행군하도록 시켰으나 이 역시 매우 어려웠다.  모두 다리의 힘이 다 빠져서다. 특히 야간에는 더욱 그랬다. 결국 앞의 대원과 뒤를 따르는 대원들을 줄줄이 연결해서 끈으로  매고 걸어가게 했다. 그래도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는 대원들에게는 어려웠다.
한 대원이 쓰러지면 뒤따르는 우리 해병들은 줄줄이 쓸어졌다. 이럴 때 그들의 모습은 정말로 처절(凄切)했다.
이 장면을 무어라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쓰러진 해병을 전우들은 구둣발로 차서 깨우고 일으켜서 계속 걷게 했다. 
그리고 우리 해병들은 힘에 부쳐 서로 부둥켜안고 쓰러지기도 했다.

드디어 포위 돌파 성공!

선두가 매봉산 좌측 산농동 능선의 두 번째 계곡을 통과 할 때, 3중대가 방향을 잘못 잡아 남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가면 중공군이 확보하고 있는 도로로 나가게 된다. 이 도로는 당시 돌모루를 통과하는 도로로서 현재의 403번 국도이다.
당시 이 도로상에는 미 해병 포병의 요란사격과 저지사격 화망(火網)이 계획되어 있어서 우군 포병의 사격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나는 3중대장(강용 대위)에게 진격 방향을 수정하도록 명령하려고 했으나 무전기는 불통이었고 게다가 내가 추위 때문에 두꺼운 귀 덮개를 하고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무전통신병과 전령을 데리고 선두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통신병과 전령이 미처 뒤따르지 못해서 단신(單身)으로 선두에 도착했다.
마침 3중대의 선두가 급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한 때여서  겨우 방향을 오른쪽으로 수정할 수 있었다. 이때가 바로 중공군의 포위 최종 진지선(陣地線)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진로를 수정하여 얼마동안 전진하다보니 용화산(878  고지) 기슭에 도착했다. 이 고지의 동과 서에는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우리 대대는 81mm박격포 및 중기관총의 지원사격 하에 공격을 실시하여 동쪽 경사면의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이를 점령했다.

해병들은 중공군보다 용감했다.
포위 돌파 작전을 하면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중공군의 전술을 피부로 체득(體得)했다. 
이것이 소중한 우리의 교훈이다.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우리는 칼이 무딜세라 매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칼을 갈았다. 그리고 맞서 싸운 중공군 그들은 역시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고 용감했다. 
그들이 독전(督戰)에 의해서 그랬는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우리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  했어야 했다.
대체적으로 중공군과의 전투는 중공군의 선공(先攻)으로  시작되었으며 주로 그것은 야간 기습공격이었다. 
그들과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많은 해병들이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중공군과의 치열했던 그 전투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비록 상대적인 피해의 통계에 있어서 중공군이 훨씬 더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해병들 역시 고귀한 희생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훗날 1952년 장단.임진강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터득한 교훈으로 수도 서울을 지킬 수 있었다.
한국해병대의 화천지구에서 포위 돌파 진격작전은 군사적으로 지대한 성과를 올렸다.
한국해병대의 감투가 우리 국민들에게 큰 감명과 더불어 자신감을 주었고 나아가서는 차후 정책결정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Posted by 날아라마린보이 완소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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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전 댓글 더보기
  2. 2014.02.04 14:24 신고

    해병정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절대 잊지 말아야겠어요..

  3. 2014.02.08 14:58 신고

    네 그렇습니다. 해병대의 숭고한 정신
    목표를 향한 집념 등은 절대로 잊어서는
    않되겠습니다.

  4. 2014.02.09 15:24 신고

    우와..멋지고 대단합니다..

  5. 2014.02.09 20:05 신고

    과거 역사의 영광된 모습을 연설할 때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자랑스런 해병의 모습 영원합니다

  6. 2014.02.12 21:01 신고

    6.25라는 과거는 가슴 아프지만 그 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해병들의 모습은 자랑스럽습니다.

  7. 2014.02.17 13:59 신고

    이렇게 또 하나 알아갑니다^^~

  8. 1181기 혁맘(1550)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2014.02.21 22:46 신고

    잘 알아 갑니다... 6.25는 슬픈 역사라서 다시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지금 군대에 있는 해병들도 안전하게 훈련 잘 하길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있는지 알고
    힘들더라도 정신력으로 잘 버텼으면 합니다.

    • 1181 말랑이 수정/삭제> 댓글주소
      2014.02.23 04:44 신고

      그러게요 어르신들 옛날생각만하면 얼마나 정신적으로힘이들까요 다시는 일어나지않았으면해요 연평도포격사건이랑요

  9. 2014.02.23 04:43 신고

    상호희생정신.. 연평도포격당시 놀랜후임이 철모가 없어졌다했는데 옆에있던선임이 자기철모씌여주고 온몸으로 막아줬다하더라구요..희생하는정신 진짜 누구보다 남다르고 멋진거같아요

  10. 2014.05.06 01:30 신고

    좋은 정보 유익하게 잘 담아가요 !!

  11. 2014.05.09 01:07 신고

    6.25의 슬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예나 지금이나 해병대는 여전히 무적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12. 2014.05.19 01:21 신고

    과거 역사의 영광된 모습을 연설할 때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자랑스런 해병의 모습 영원합니다

  13. 2014.05.27 23:02 신고

    정말동족상잔의아픔을다시느끼지않도록... 다시한번새기고갑니다

  14. 2014.05.27 23:12 신고

    6.25라는 과거는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 해병들이 열심히 나라를 지켜주셔서 정말감사드립니다!!

  15. 1187기 김민채누나(솔)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2014.07.30 16:25 신고

    감사합니다.그리고자랑스럽습니다!

  16. 2014.08.02 10:50 신고

    6.25전쟁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를 평화로운 이 땅에 살게 해주신 분들의 모습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7. 2014.08.02 13:03 신고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8. 2015.01.27 02:41 신고

    한번해병은 영원한 해병!!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것이다!!
    모든 해병의 가족들 힘내세요~~~!!

  19. 2015.02.14 18:33 신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아름답습니다!

  20. 2015.02.14 18:33 신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아름답습니다!

  21. 2015.02.15 15:45 신고

    해병들은 중공군보다 용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