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역 근무할 때, 덕산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해병대 사령부를 일컫는 말이다.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되었기 때문에
해병대 사령부가 자리를 옮겨도 그 명칭은 계속 덕산대로 불리게 된 것이다.
본부가 비록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그곳을 덕산대라 부르며 처음 탄생을 잊지 않는 마음. 나 역시 현역으로 근무할 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마크사에서 파는 각개티, 더블백 뒤에 쓰여진 ‘since 1945 덕산’이라는 글귀를 보면서
항상 그곳을 떠올리곤 했었다.

 전날 심중위님과 만나서 늦게 들어왔지만,
진해를 가기 위해 아주 일찍 일어났다.
전날까지 장거리 운전을 해서 피곤할 법도 한데,
내륙 촌놈이라 그런지 바닷가를 보러 가는 길이 신나기만 했다.
차로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진해 사령부.
전날과 마찬가지로 날씨는 엄청 포근했다.
기대에 부푼 마음에 부대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 해병대와 관련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창설 당시 사용했던 비행장 격납고라든지, 본부 건물은 둘째 치고,
포항으로 이사 오기 전의 진해 신병교육훈련단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진해 사령부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에
돌로 만든 해병혼 세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고,
이곳이 과거에 해병이 존재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진해 사령부 앞의 해병혼 고지 때문인지,
해병대가 있는 곳엔 어디든 해병혼 고지가 전통처럼 있었다.
포항 1사단의 유격장 가는 길도 그랬고,
내가 근무했던 63대대 앞에도 해병혼 고지가 있었다.
진해의 해병혼 고지를 바라보니,
문득 현역 시절 63대대 위병소 근무를 설 때 선임이 해주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해병혼 고지는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는데,
각 글자마다 봉우리가 있고, 가운데 글자인 병자의 봉우리가 가장 높다.
그 세 개의 봉우리들을 군생활에 빗대어 선임들은 이런 농담을 즐겨 했다.

‘저 산이 왜 해병혼 고지인 줄 알아?
저게 바로 해병 군생활이기 때문이야.
자 이제 왼쪽에서부터 군생활 시작한다~
처음 이병! 아주 힘들어~
낑낑대면서 힘들게 올라가서 해자 즘에서 일병 달았어.
아 근데 쉴 틈이 없네. 올라가야지 뭐.
계속 앞만 보고 낑낑대며 올라가다보니 어느새 상병달고 군생활 반 온 거야.
저기 병자 가운데 고지에 온거지.
하~ 이제 좀 편한가부다 하고 내리막 좀 타려는데, 어디 그렇게 냅둬?
병장 달 때까지 또 고생 좀 해야지..
그러다 병장 달고
그 때부터 편하게 내려오면서 산 옆에 서 있는 탱고타고 집에 가는 거야. 알겠어?
너 지금 어디야. 아직 해자도 못 올라왔네?ㅋㅋ
열심히 올라와. 그러다 보면 너도 편히 내리막길 걸을 때가 올 거다.’



나는 선임의 이 농담이 아주 재미있었다.
근무를 서며 남은 군 생활을 세어보는 해병의 심정이 담긴 이야기 같았다.
이 재미난 농담을 들으며 속으로 ‘저 이야기는 누가 처음 지었을까?’했는데,
진해의 이 해병혼 고지를 보니 왠지 이때부터 전해 내려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해병혼 고지를 바라보며 한참을 걸었는데,
해병대 발상탑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지나가는 해군 상사분께 여쭈었더니, 길을 돌아 계단 위로 올라가면 있다고 하셨다.
해병대는 1949년 덕산비행장의 격납고에서 창설되었다고 들었는데,
발상탑이 언덕위에 있어서 조금 의아해했다.
하지만 발상탑이 있는 언덕 위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계단 옆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던 해병혼 고지가
발상탑에 올라가니 탁 트인 전경을 연출하며 마주 보고 있던 것이었다.




발상탑 앞의 향로를 보니 제단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해병대 처음 세운 곳’이라는 문구를 보았을 때엔,
가슴속에서 조용히 솟구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왜 해병대 발상지 혹은 해병대 창설탑 같은 간단한 문구를 두고,
해병대 처음 세운 곳이라는 풀어서 쓴 문구를 넣었을까.
줄여 쓴 한자어가 아닌 풀어 쓴 우리말을 넣은 이유는
해병대가 창설될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잘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는 상부의 지시로 일순간에 쉽게 창설된 부대가 아니다.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며 필요성이 제기되긴 했지만,
당시 해군 수뇌부와 달리 해병대 창설에 회의적이었던 국군 수뇌부 때문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일어난 선배들을 기리는 문구로는
간단한 한자어보다 풀어 쓴 우리말이 훨씬 더 어울린다.
쉽게, 일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힘에 힘을 보태어 처음 이곳에 해병대를 세웠다는 뜻이다.
그 어떤 황금탑보다 멋진 우리 해병대 발상탑.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의 정신은 처음 창설부터 이렇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진해 사령부 내에 해병대와 관련된 것은 이 발상탑이 전부라고 한다.
혹시라도 더 있을지 몰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모두 이 발상탑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떠나기 전, 책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기억에 남아
덕산 비행장 활주로에서 잠시 내려 셔터를 눌렀다.
이렇다 할 연병장도 없었던 초창기의 해병대원들은 이 활주로를 훈련장으로 삼았는데,
시멘트로 된 활주로에서 포복훈련을 할 때에는 바닥이 피로 흥건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열악한 여건을 똘똘 뭉치는 계기로 삼았던
선배님들의 사진 속 모습이 떠올라 활주로 주변을 카메라에 담았다.

                                                 덕산 비행장의 활주로


                              창설 초기 활주로 주변에서 받던 선배님들의 훈련

사령부를 나와 간 곳은 안민고개이다.
안민터널이 생기기 전까지 진해와 창원을 이어주던 이 고개는
초창기 해병의 대표적인 훈련코스였다.
가파른 이 고개를 넘어 정상에 섰을 때엔 눈물을 쏙 뺀다 하여
해병들 사이에서 눈물고개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면 백령도에도 눈물고개가 있었다.
 63대대 앞 이름은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고 해서 깔딱고개.
공식적인 명칭들은 아니지만,
행군에 지친 해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다.
내가 갔던 이 날 안민고개는 벚꽃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고 있었지만,
이곳을 눈물과 땀으로 넘었을 선배님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지기도 했다.

                                      안민고개에서 바라본 진해시 전경

                                         안민고개 정상의 안민생태교


이 아름다운 안민고개는 벚꽃을 만끽할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개발 되었는데,
드라마 로망스에서 김재원, 김하늘 배우가 열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안민고개 말고도 여좌동의 여좌천에서도 드라마 로망스를 촬영했는데,
진해의 아름다운 벚꽃이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군항제가 전국적인 큰 축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갔던 이 날은 군항제 축제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벚꽃이 만개하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봄 날씨 때문이었는지 꽃이 아직 다 피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천안함 사태로 인해 군항제의 모든 군 행사가 취소되면서
시 전체가 숙연한 분위기였다.




벚꽃을 감상할 수 있는 또 다른 코스인 해군 사관학교는 더욱 그러했다.
군항제 기간 동안 일반에 해군 사관학교를 개방하여
교정의 아름다운 벚꽃과 바닷가 경치를 시민들에게 선사했었지만,
이 날만큼은 더 없이 슬퍼 보였다.
고 한주호 준위님께서 생전에 근무하셨던 UDT 부대가
해군 사관학교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해병을 떠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해군을 위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시민들 역시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사관학교를 둘러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교정의 벚꽃을 보러 왔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나이다.’라는 손원일 제독의 어록비 앞에서
한참 머물러 있곤 했다.




해병대와 해군은 처음 창설부터 지금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병들의 존경을 받아온 해병대의 많은 장군님들이 이 해군사관학교를 나오셨고,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께서는 해병대를 특히 아끼셨다.
그런 해군이 친척과 같기에 더 슬펐고,
백령도에서 근무했던 경험 때문인지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교정을 걷고 있었는데,
6.25 때 바다의 수호신이었던 백두산함의 마스트가 보였다.
해군 창설 이후 제대로 된 전투함이 한 척도 없던 상태에서 미군으로부터 구입해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하고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백두산함.
그 초대 전투함을 기리기 위해 마스트만 따로 이곳에 전시해 두었다.
높이 솟은 백두산함의 마스트를 보며,
지금의 힘든 시간을 잘 극복하여 다시 대한민국 해군의 웅지를 높이길 기원했다.


                                                백두산함 마스트


    해군 사관학교 내의 기념품판매점 풍경. 곳곳에 해병대의 기념품도 눈에 띈다.


사관학교를 나와 고속도로 입구로 차를 몰았다.
이제 해병대가 첫 임무를 맡았던 진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해병대 1기, 2기 선배님들께서 활주로를 피로 물들이고,
천자봉과 안민고개를 넘나들며 갈고 닦은 실력을 처음으로 보일 기회가 온 것이었다.
1949년 여름, 해병대 창설의 필요성을 일깨웠던 여수 순천 반란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을 근거로 경상남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공비토벌을 성공적으로 이끄셨던 1기, 2기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니, 당시 진해를 떠나시던 선배님들의 비장한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주둔지로 삼았던 진주교대, 토벌 작전 성공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한 진주성부터
무장공비가 그렇게 맛나게 먹었다는 찐빵집까지
진주에 해병대가 거쳐간 곳은 모두 가 볼 생각이다.
진주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마치 첫 근무를 들어갈 때처럼 설레이기 시작했다.

 


 

                        

Posted by 날아라마린보이 완소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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