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정신은 화염보다 뜨거웠다.
11월 23일. 우리를 슬픔과 분노에 빠뜨린 북한의 공격이 있은 지 어느덧 1주일이 되간다. 아픔은 시간의 물결에 씻겨나간다고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청춘의 두 해병을 잃은 슬픔은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전투에서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져오기 시작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그 극한의 전장 속에서, 나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해병들. 나의 목숨보다 전우의 목숨을 먼저 생각한 해병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그 처절하고, 용감하고, 아름다우며, 슬픈, 그 생생한 이야기들을 만나보자.
# 이 한 장의 사진.
사진속의 해병들은 포상에 불이 붙어있는 상황 속에서도 포끈을 놓지 않았다.
전쟁영화에서나 보던 포탄이 떨어지던 그 현장. 같이 웃고 장난치던 전우들이 포탄에 쓰러져가는 현장에서, 우리 젊은 해병들은 얼마나 무섭고 혼란스러웠을까. 하지만 우리 해병들은 그저 훈련받은 대로, 그저 지시받은 대로 뛰고 행동했다. 뜨거운 화염과 떨어지는 포탄 속에 우리 해병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일까.
포7중대 상병 박진관. 포상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장면을 본 그의 행동은 소화기를 들고 포상으로 뛰어 가는 것이었다. 포상에는 여전히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박 상병은 소화기로 불을 끄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 순간 박 상병의 머릿속에는 저 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무모한 행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무엇이 그를 그렇게 이끈 것일까.
평소처럼 교육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대원들. 갑자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내려진 중대장의 전투배치 지시. 마냥 철없는 젊은이들인 것만 같던 우리 스무 살 청춘들은 포탄과 화염을 뚫고 각자의 포를 향해 달려갔다.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불길을 해치며 뛰어갔다. 폭격의 화염이 자신을 휘감아 철모가 타들어갔다. 철모의 외피가 다 타들어가고 턱끈과 전투복도 화염에 휩싸였다. 뜨겁다. 아니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들에겐 임무가 우선이었다. 불탄 철모의 주인공 임준영 상병. 모두가 그의 마음과 같았다. 포반이 하나가 되어, 중대가 하나가 되어 전투배치를 마쳤다.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고, 전우가 스러져가는 전장의 공포를 어찌 글로 끄적거릴 수 있으랴. 하지만 그 공포를 이겨낸 해병들은 적을 향해 포탄을 날리고 있었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 이 젊은 해병들의 헌신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이끈 것일까.
# 전우를 위해 포화 속으로
정비소대 조수원 일병. 1차 피폭당시 부상을 당한 그는 고통을 참으며 후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구급차. 하지만 구급차가 후송할 수 있는 인원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조수원 일병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동료해병들의 얼굴이었다. 조수원 일병은 난처해하는 의무요원에게 자신보다 동료들을 먼저 후송해줄 것을 부탁한다. 파편이 몸을 후벼 파는 고통 속에, 자신보다 전우들의 고통을 빨리 덜어주고 싶었던 조 일병.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조수원 일병에게 누군가 손을 내민다. 고개를 든 그의 눈 앞에는 들것을 가져온 동료 해병들이 서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들것을 들겠다는 해병들에게 한 병장 선임이 이야기한다.
“4명만 남고 나머지는 다 벽에 붙어서 몸을 숨겨라”
그리고 그 4명의 스무 살 젊은 해병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들것의 손잡이를 잡고 전력질주를 하는 그들에게 날아오는 포탄과 뜨거운 화염은 그저 발에 치이는 작은 돌무더기나 다름없었으리라. 그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그들을 뛰게 만든 것은 전우를 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 뿐이었다. 흔들리는 들것에 누운 듯 눈을 감고 그 날의 하늘을 보라. 떨어지는 포탄 소리와 뜨거운 화염. 그리고 이를 악문채 뛰어가는 그 4명의 얼굴. 수도병원에 입원 중인 조 일병은“그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것입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 너는 내가 반드시 살린다. 걱정마라!
김지용 상병 역시“담당관님이 없었으면 저는 죽었을 것입니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화기 중대의 김 상병은 북한의 포격 당시 마을에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주민들을 방공호로 대피시킨 김 상병이 부대로 복귀하자, 곧 2차 폭격이 시작됐다. 북한에서 포를 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곧 건물에 포탄이 무자비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김 상병에게 빨리 철모를 쓰라고 지시한 것은 중대 관측담당인 김종선 상사였다. 철모를 쓰고 포탄을 피해 뛰던 김 상병은 중앙현관 부근에서 쓰러졌다. 목에 파편상을 입은 것. 아프다. 몸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 어지럽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때 김종선 상사가 달려왔다.
“지용아!!!”
“담당관님. 저 맞은 것 같습니다.”
이미 피가 흐르는 그의 목을 지혈하고 있던 김종선 상사는 사랑하는 부하에게 말한다.
“지용아! 너는 내가 절대 죽이지 않을 꺼다. 내가 반드시 살린다. 걱정마라!”
김 상사는 건물 외부의 엄폐가 가능한 탄약고를 떠올렸고. “지용아! 탄약고로 가면 살 수 있다. 탄약고까지 가면 살 수 있는 거야!” 라고 외치며 김 상병을 탄약고로 피신시켰다. 탄약고에 도착한 김 상병의 머릿속엔 절친했던 심정우 상병과 강은규 일병이 생각났다. 건물 안에서 포격에 쓰러졌을지 모를 두 전우. 이 사실을 김 상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다시 포격이 쏟아지는 건물로 들어갔다. “심정우! 강은규!” 김종선 상사의 외침에 피신하고 있던 두 해병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들 역시 탄약고로 몸을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주
정비소대의 이진규 일병은 포격이 시작되자 몸을 숨길 수 있는 부대 거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거점까지 약 10여 미터쯤 남았을까. 그들을 적의 포탄이 덮쳤고 나란히 달리던 해병들은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부상을 면한 차재원 하사가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미 통신이 두절된 상황. 구급차를 부를 수 있는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었다.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해병들을 본 차재원 하사.
“얘들아! 내가 가서 구급차를 불러올게. 너희는 여기서 반드시 살아 있어라!”
그리고 그는 뛰기 시작했다. 포탄이 그가 가는 길에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포격이 멈추자 구급차가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숨을 건 질주. 그 질주가 우리의 해병들을 살렸다.
중화기 중대의 김인철 일병 역시 1차 폭격 당시 부상을 당해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 하지만 계속되는 포격으로 구급차가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 일병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던 최영진 상사와 신현욱 하사. 그들은 자신들의 차키를 꺼내들었다. 김인철 일병을 부축해 차에 태운 그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길을 질주해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숨을 건 질주. 그 질주가 우리 해병들을 살린 것이다.
# 전역했지만 전우를 잊을 수 없었던 그들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개구리마크를 단 두 명의 예비역해병이 찾아왔다. 중화기중대 박인혁, 윤슬기 예비역 병장. 사건당일 전역교육대에 입소하여 전역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부대 훈련의 안전통제요원으로 나서겠다며 자발적으로 훈련에 참가했던 그들이다. 그러던 중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선임인 두 해병은 자욱한 포연 속에서 후임들에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대피호로 피신 시켰다. 이틀 후인 25일 전역하여 연평도를 출도한 이들은 곧바로 수도통합 병원을 찾았다.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두 명의 전우, 그리고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전우들을 보는 그들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해하는 두 해병의 손을 잡는 그 부모들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너희들이 미안할 것 없다……. 찾아와줘서 고맙다. 아들아”
# 이 해병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다.
오인표 하사는 자신을 부축하고 의무대로 달려간 동료 부사관 서아준 하사가 없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김성환 일병은 대피 중 쓰러진 자신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자신을 부축해준 전우를 찾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상을 당했지만 끝까지 전우들과 남아있겠다며 후송을 거부하던 박봉현 일병은 상태가 악화되어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자 강제 후송되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가족도 아니며 친하지도 않은 이들을 위해 선뜻 포탄이 떨어지는 길을 질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라면 적의 포탄이 비 오듯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화염을 헤치고 자신들의 포를 향해 달려갈 수 있겠는가. 글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극한의 상황 속에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 포격의 화염도 해병대의 전우애보다 강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포탄과 타오르는 화염도 전우를 살리려는 해병들의 눈물겨운 사투를 막을 수 없었다. 적의 포탄이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지언정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그들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의 20대. 약하고, 자기밖에 모르며, 편한 것만 찾으려 한다는 기성세대의 걱정이 컸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 날 우리 대한민국의 20대. 대한민국 해병들이 보여준 모습은 60년 전 6·25 전쟁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한 순국선열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저 전통으로만 알려졌던 전우애와 군인정신은 또다시 현실로 나타나 서로를 구했고 연평도를 지켜냈다.
너무나 처절했던 연평도 전투. 그 주인공이었던 해병들은 전우를 잃은 슬픔을 뒤로하고 여전히 연평도를 지키고 있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격려를 보내는 것 밖에 없는 사람들의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저 묵묵히 그 곳을 지키는 해병들의 뒷모습이 우리를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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