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인 어제,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아 해병대 제2사단의 관할지역인 김포 최전방에 있는 애기봉 전망대에서 북한 동포들에게 사랑을 메세지를 전파하기 위한 점등행사가 2004년 이후 7년 만에 열렸습니다.
해발 155m이며, 북한과의 거리가 1.3km에 불과한 애기봉 전망대는 해병대 청룡부대가 관할하는 민통선 이북지역에 자리잡고 있는데 검무소를 통과해야 출입이 가능한 곳입니다. 관군 협의를 통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연중 방문하는 국민 안보관광지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1977년 5월 18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김포 애기봉 정상에서 열린호국광명등탑 점화식>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는 애기봉 점등행사는 정전협정 체결 이듬해인 1954년, 북한에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기봉의 소나무에서 처음으로 성탄수를 만들어 불을 밝힌 것이 시초입니다. 그리고 71년 30m 높이의 철탑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거쳐 2003년 12월 11일까지 49년동안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 연 2회 실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애기봉 점등행사는 2004년 6월 3일,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합의에 따라 중단되었고 북한은 당시 '애기봉의 철탑과 자유로의 차량 불빛이 북측을 가장 자극하고 있다'는 이유로 철탑 철거를 요구한 바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애기봉의 유래를 살펴볼까요?
※ 애기봉의 유래
지금부터 366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당시 평양 감사는 애첩이었던 애기(愛妓)를 먼저 피난보내고 뒤따라 남하하던 중 지금의 개풍군에서 오랑캐에게 끝내 돌아오지 못했으나 애기는 매일 이 봉우리에서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끝내 지치고 병들어 죽으면서, 후에 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1966년 10월 10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기(愛妓)의 애절한 사연을 듣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왕래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사연과 같다며 이곳을 애기봉이라 명명하고 친필휘호를 하사하여 애기봉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지금부터 366년 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당시 평양 감사는 애첩이었던 애기(愛妓)를 먼저 피난보내고 뒤따라 남하하던 중 지금의 개풍군에서 오랑캐에게 끝내 돌아오지 못했으나 애기는 매일 이 봉우리에서 강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끝내 지치고 병들어 죽으면서, 후에 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1966년 10월 10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기(愛妓)의 애절한 사연을 듣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왕래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사연과 같다며 이곳을 애기봉이라 명명하고 친필휘호를 하사하여 애기봉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예배를 애기봉 전망대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성탄수 점등행사는 일몰 시간에 맞춰서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수가 밝혀지자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순복음교회 성가대의 성탄축하 찬양과 참가자들이 부르는 통일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은은한 성가각 울려퍼지는 가운데 성탄수에 장식된 1천 여개의 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는데요. 참가자들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1.3km 떨어진 북녘 땅 동포들에게 성탄절의 기쁨과 평화에 대한 소망을 전했습니다.
*석가탄신일 애기봉 사진 국방일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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